산문

보길도 여행

이석규작가 2011. 2. 20. 09:21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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보길도 여행 남도 여행 1번지 나주평야를 가로질러 영암에 들려 연포탕으로 출출한 배를 채우고 거기 월 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진치고 있는 천연 동백숲에서 도시의 때와 먼지를 벗겨 훌훌 털어내고, 또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정갈하면서도 푸짐한 정식도 한번 먹어보고, 따끈따끈한 온천에서 몸도 푹 당구며 하룻밤 쉬어가는 것도 좋다. 영암에서 한 40분 달리면 해남이 보인다. 해남에서 땅 끝 마을을 구경하고 늦었다 싶으면 노화도로 가서 자고 아침 첫 배로 가는 게 좋은데<차를 가져갔다면 배에 싣고 가는 게 거기 서 택시를 대절하는 것보다 낫다.> 보길도에 가면 날 첫 번째로 날 반기는 사람은 孤山 윤 선도이다. 가기 가면 그가 말년을 노래한 어부사시사가 솔바람으로 들려오는데... 귀를 모아 가만히 가슴으로 들어야 들린다. - 우리의 삶은 부귀공명이 우선이 아니고 내 삶의 멋 내기 맛 내기이고, 또 자연의 이치에 따름이 신선의 세계요, 부처의 세계이며, 인간 최고의 삶이라고 외치고 있는 孤山의 노래를 들어야 하는데, 들은 사람은 그간의 피로가 싹 풀리고 비용이 전 혀 아깝지 않게 된다. 그러나 그 孤山의 노래를 나는 내 눈과 코와 입이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, 그 옛날의 한 선 비의 덕목과 낭만으로 듣는 것이 아니고, 다만 나의 이성과 양심으로 듣는 것이다. 그리고 그 느낌과 깨달음을 내 세계관과 견주어보는 것이다. 그것만으로도 보길도에 온 것은 참 잘 온 것 이다. 부용동 입구에 있는 세연정은 그 골짝을 흐르는 물을 판석으로 막아놓은 한 600여평쯤 되는 연못인데 그 연못 중간 중간에 큼지막한 바위와 소나무가 있어 더 좋은데, 그 긴 여운의 운치 로 보길도의 주산인 남쪽의 격자봉(453m)과 마주 보고있는 북쪽의 오운산(250m)이 200~300m 의 높고 낮은 봉우리를 양팔로 둥글게 싸안고 있는 산중턱에 동천석실에 오르면 잃었던 따뜻 함과 아늑함을 찾을 수 있다. 그곳의 소나무와 여러 잡목들이 해와 달의 기운을 서로 먼저 받 아들이고 싶어서 용을 쓰다가 그만 엎어진 나무들 넘어진 풀잎들 사이에서 산새들은 여기저 기에서 운다. 아낙네들이 산나물을 캐다가 땀방울을 훌치며 부르는 육자배기 한 소절도 들린 다. 나는 이 산에서 孤山을 생각하며 걷지만, 산은 너 자신을 생각해 봐라 는 듯이 바람은 자꾸 불고, 그 바람에 나무들이 한 순간 휩쓸려 기우뚱 하더니 우~우~ 울고, 그러다가 금세 제자 리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또다시 바람이 불자, 나무들이 그 바람으로 선녀 춤사위를 만들어 내 는 것을 보며, 나무는 잎이 져야 꽃이 피고, 꽃도 져야 열매가 맺히는 그 오묘한 이치에서 내 꿈을 아니 느낄 수 없다. 오은山 정상이야말로 최고의 전망대이다. 이곳에선 사면의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, 그 바 다에서 얄미운 바람과 싱그러운 바람이 한 파도를 앞에 놓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기氣 싸움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. 그리고 파란 비단옷을 펼쳐두른 듯한 해수욕장들이며, 지고지순한 여느 처녀의 마음 속 같은 동백꽃이 피어 있는 이 산의 계곡은 오로지 한 순정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듯하다. 그러나 서울 남산 식물원에서와 같이 누가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, 남한산성과 같이 에워싼 것도 없는데도, 어느 빈틈 하나 없이 구석구석을 제 멋으로 꽉 채우고 있는 이 충만, 이 여유를 감상하는 것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. 그저 산에서는 산이 되고싶다고 산의 말을 만분지일이라도 귀담아 들을 수 있다면 도시에서 쉽사리 얻을 수 없는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이 산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는 내 산 같다. 나의 산 바람이 지나가고 사라진 자리 그 얼룩을 씻어주는 이슬 산이고 싶다 밟으면 밟을수록 애틋한 상상 속에 머물고 있던 꿈이 틀을 깨고 허물을 벗는 산 생각만 해도 시원한 산이고 싶다 앉은뱅이, 꼽추, 키다리, 뚱뚱이, 훌쭉이 나무들이 그런 사람들이 퍼질 대로 퍼져 치렁치렁 늘어진 잎사귀 밑에서 자유가 의지를 만들고 의지가 의미를 만나 쉼을 얻을 수 있는 산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는 산이고 싶다 아무 거리낌 없이 앞가슴 풀어 헤치고 우는 아이 젖 물리는 어머니를 닮아 늘 부족한 무엇 하나 우리에게 채워주는 산 홀로 오은산을 내려오다가 마주친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하게 되는 좁은 길에는 풀벌레가 있고, 그 숲 아래 비탈에는 밭이 있고, 그 밭에는 채소들이 자라고, 채소 넘어는 시퍼런 바다- 파도들이 요동을 친다. 이 소박함 속에 애틋함을 살짝 감춘 풍경으로 한참을 가다보면 방품림 이 동백나무이고 몽돌이 서로 부등 켜 앉고 밤새도록 우는 예송리해수욕장이 나온다. 보길도에는 4개의 해수욕장이 있는데 나는 이곳의 풍경을 잊을 수 없다. 그 옛날 그 때의 광 경光景을 자세히 그려보자. - 늦가을이었는데도 벌써 동백이 피어 몹쓸 바람에 떨어진다. 새 우잠 몽돌은 잠 못 들고, 몸은 자꾸 파도에 깍 이는데, 물속을 유유자작 뛰놀던 숭어 한 마리 앗, 파도를 가르며 살짝 솟아 인사도 않고 그만 사라진다. 그리고 파도는 파도와 마주쳐 거품 일 일더니 그 속에서 한 20년 상사병에 걸린 한 사내의 애끓는 소리가 난다. 그러나 한 꿈의 과정이라면 저 몽돌같이 닿고 달아도 서러울 것도 없고, 누굴 원망할 일도 아닌 것이다.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, 차라리 내 꿈을 파도에 던져 물거품이 될망정, 내 꿈을 더럽히지 않겠다. 꿈의 혼魂, 꿈의 꽃은 피지 않아도, 그 마음만으로도, 내 가슴이 따뜻해 오고, 아늑해 오기 때문에, 그런 꿈은 영원히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. 나는 이런 희비喜悲로 큰다. 그리하여 나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곳의 동백과 몽돌을 거울삼는다. 오늘도 보길도의 孤山의 얼과 예송리해수욕장의 동백과 몽돌은 한 파도로 흐른다. 이따금 고기들이 뛰노는 소리도 풍덩풍덩 들린다. 포구에는 빈 배가 매어 있고, 그 옆에는 그물을 손 질하는 어부가 있다. 그리고 만선의 깃발을 휘날리며 돌아오는 어선은 뱃고동을 요란하게 울 리며 보고싶은 가족의 이름으로 파도를 헤치며 들어 온다. 나는 이런 풍경 속에서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생각하며 해안 절벽을 돌아 선창가를 찾았다. 선창가 나루는 여느 마라톤의 반환점같이 보인다. 내가 탄 배는 믿음, 무사히 육지에 안착할 거라고 애써 불안을 잠재운다. 중간쯤 왔을 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굵은 장대비가 쏟 아지고 배가 요동을 친다. 멀미를 심하게 하는 나에게 한 승객이 다가와 등을 토닥여 주면서 하는 말<여기 올 때는 일기 예보를 꼭 듣고 와야 고생을 안 한다 한다.>에 내 여행준비가 허 술한 것이 들통 나, 그 후 끽 소리도 못했지만, 이 멀미 고생으로 내 삶의 여행도 쪼금은 편안 할 것만 같다. 그런 깨달음 속에서 날아오는 갈매기가 지저귀는 소리, 파도치는 소리도 듣고, 맞바람도 맞아 보고, 심심하면 배 난간을 붙잡고 내 십팔번 남진의 빈 잔을 조용히 불러보기 도 하고, 왠지 모르게 궁금한 친구에게 전화도 한번 걸어보고, 내일 출근하면 없었던 용기도 펄펄 솟을 것만 같았던 보길도 여행........... 아아, 아주 좋은 곳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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